
[TV리포트(카리포트)=임재범 기자] 27세의 동경대 기계과 출신 젊은이가 뉴욕에서 배편으로 귀국했다. 뉴욕을 보고 충격에 빠진 그는 ‘공업을 부흥시켜 일본을 풍요롭게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2년 뒤 그는 미국을 다시 찾는다. 표면적으론 자동직기 특허권 계약을 위해, 실제로는 자동차 산업을 좀 더 꼼꼼히 살피기 위해서였다. 1930년, 미국에서 돌아온 그는 깜짝 선물을 받았다. 돈이었다.
방직기 회사를 운영하던 아버지 도요타 사기치(豊田在吉)가 자동직기 특허권을 영국에 팔아 마련한 당시 돈 100만 엔이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100억 원 이상이었다. 거액을 쥔 아들의 이름은 도요타 기이치로. 토요타 자동차의 창업자였다. 사기치는 이런 당부를 덧붙였다.


“기이치로야, 난 평생 방직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는 일로 나라에 충성을 다했다. 우리 시대엔 방직과 견직이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가장 중요한 산업이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다가올 20세기는 자동차의 시대야. 내가 자금을 대줄 테니 넌 좋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하거라.”
이듬해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기이치로가 대를 이어 사장 자리에 올랐다. 그는1933년 9월 토요타 직기 내에 자동차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직원 몇 명과 시작차(프로토타입) 제작에 뛰어들었다.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었다. 쉐보레를 한 대 사서 낱낱이 분해한 뒤 부품을 똑같이 베껴 다시 조립하려는데, 넘치는 의욕과 달리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모래를 털고, 거푸집을 벗길 때마다 모두의 얼굴엔 실망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수 없는 실패를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엔진의 모습을 갖추고 나니, 이번엔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매번 푸드득거리며 블록을 깨뜨리기 일쑤였다. 또 다시 셀 수 없이 많은 밤이 지난다. 그러던 어느 날, ‘부르릉~’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엔진이 기운차게 돌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첫 번째 과제를 해치운 이후의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1934년 9월 첫 프로토타입 엔진을 완성했고, 이듬해5월엔 첫 시작차, A1을 만들었다. 같은 해 트럭 G1도 개발했다. “우리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일본의 공업을 발전시키겠다”는 기이치로의 오랜 염원이 현실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기이치로는 지금의 토요타시 자리에 60만평(약1.98㎢)의 부지를 사서 공장을 지었다. 당시 지명은 코로모시였다. 1936년 3월 A1, 5월엔 G1의 양산에 들어갔다. 9월엔 역사적인 새차 발표회도 가졌다. 나아가 1937년8월, 토요타자동차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토요타 사기치가 후원의지를 밝힌지 8년 만에, 기이치로는 독자 모델 생산하는 자동차 회사를 세웠다.


토요타의 지난날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2차 대전을 겪으며 자재를 구하기 어려운 가운데, 승용차와 트럭 생산을 병행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노동쟁의까지 일어나 회사는 부도직전에 몰렸다. 1500명의 노동자를 감원하고, 임원을 물갈이 하는 등 회사가 한바탕 들썩였다.
기이치로는 은행채권단에 융자를 더해줄 것을 간청했다. 하지만 은행의 반응은 싸늘했다. 망해가는 회사에 자금을 더 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채권단과의 줄다리기 협상 끝에 토요타는 판매회사를 새로 만들어 융자를 얻기로 한다. 채권단은 경영악화의 책임을 지고 기이치로가 회사에서 물러날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기이치로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토요타자판의 사장은 사기치와 기이치로 밑에서 회사살림을 돕다 토요타직기 사장까지 오른 이시다가 맡았다. 자동차를 잘 몰랐던 이시다는 기이치로의 사촌동생, 에이지와 당시 일본에서 ‘판매왕’이라 불리던 판매회사 사장, 가미야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회사재건에 나섰다. 모르는 걸 부끄러워 않고, 스스럼없이 도움을 청해 귀 기울일 줄 아는 경영자였다.


이시다는 지독한 구두쇠기도 했다. 차급에 넘치지 않는 수준의 부품을, 꼭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만 사도록 했다. 회사에 돈이 없어 담당직원이 트럭을 끌고 부품회사를 돌며 반나절, 혹은 몇 대분의 부품만 사서 자동차를 만들었다. 토요타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간판방식’과 ‘저스트 인 타임’은 이시다의 이런 구두쇠정신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구두쇠 정신은 부품의 불량률을 줄이는 데까지 영향을 끼쳤다. 부품 고장은 라인을 멈춰 서게 했고, 이는 고스란히 손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토요타는 금융지원 등의 노력을 통해 협력업체의 기술수준을 끌어올렸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연구는 지금도 쉴 새 없이 계속되고 있다. 춥고 배고팠던 시절이 오늘날 토요타의 단단한 초석이 된 셈이다.
임재범 기자 happyyjb@tvrepor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