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노의 플래그십 크로스오버, 필랑트를 다시 마주한 건 단순한 시승이 아니라 ‘효율’을 확인하기 위한 검증의 시간에 가까웠다. 이미 한 차례 경험을 통해 이 차의 완성도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숫자로 증명해보고 싶었다. 결과부터 말하면, 이 차는 기대 이상으로 ‘현실적인 효율’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대형 크로스오버였다.
출근 시간, 정체로 가득한 도심에서 시작된 테스트는 꽤 가혹한 조건이었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흐름 속에서 23km를 달린 결과는 리터당 14.9km. 공인 복합연비 15.1km/L에 거의 근접한 수치다. 이 정도 덩치(약 1.8톤)에 E세그먼트 크로스오버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이 구간에서 ‘기술의 방향성’은 분명해진다. 도심 주행의 최대 75%까지 전기모드로 주행이 가능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실제 환경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어진 속초까지의 장거리 주행. 총 196.8km를 달리는 동안 기록된 연비는 리터당 25.0km. 단순히 잘 나왔다고 말하기엔 다소 놀라운 수치다. 이 결과는 필랑트의 듀얼 모터 기반 하이브리드 구조가 단순한 연비 개선 수준이 아니라 ‘상황별 최적화’에 가깝게 작동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구동 모터(100kW)와 시동 및 보조 역할의 HSG 모터(60kW)가 상황에 맞게 개입하면서, 불필요한 엔진 개입을 줄이고 효율을 극대화한다.
이런 효율성은 단순히 파워트레인만의 결과는 아니다. 실제로 차를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디자인부터 이미 공기역학과 효율을 고려한 흐름이 읽힌다. 전장 4,915mm의 차체는 길고 낮게 깔려 있고, 루프라인은 쿠페처럼 매끄럽게 떨어진다. SUV의 부피감을 줄이고 패스트백 세단의 실루엣을 입힌 이유가 단순한 스타일링이 아니라는 걸 주행하면서 체감하게 된다. 고속에서 차가 유난히 안정적으로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이유다.
실내로 들어오면 분위기는 또 달라진다. 외관이 ‘속도’라면, 실내는 ‘정제된 기술’이다. 대시보드를 가로지르는 openR 파노라마 스크린은 단순히 크기에서 오는 임팩트를 넘어, 차량의 모든 경험을 디지털 중심으로 재구성한다. 운전석, 센터, 조수석까지 이어지는 3개의 12.3인치 디스플레이는 각각 독립적으로 작동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특히 조수석 디스플레이의 활용성은 꽤 인상적이다. 단순한 ‘보조 화면’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엔터테인먼트 공간에 가깝다. 블루투스 헤드폰을 연결해 운전자에게 방해 없이 콘텐츠를 즐길 수 있고, 웹 브라우저나 OTT, 심지어 게임까지 구동된다. 장거리 주행에서 동승자의 피로도를 확실히 줄여주는 요소다.
인포테인먼트 반응 속도는 아주 빠른 스마트폰 수준은 아니지만, 흐름이 끊길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UI 구성과 직관성이 좋아 사용 스트레스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 OTA 업데이트와 AI 음성 어시스턴트까지 더해지면서, 이 차는 시간이 지나도 계속 진화하는 ‘소프트웨어 중심 차량’의 성격을 갖는다.
주행 감각은 효율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완성도를 보여준다. 저속에서는 거의 전기차처럼 조용하게 출발한다. 모터 특유의 부드러운 토크가 1.8톤에 가까운 차체를 가볍게 밀어낸다. 그리고 가속이 깊어질수록 엔진이 개입하는데, 이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변속 충격이나 이질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멀티모드 오토 기어박스와 듀얼 모터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결과다.
고속도로에 올라서면 이 차의 진짜 성격이 드러난다. 직진 안정성은 기대 이상이다. 스티어링은 과하게 민감하지 않지만 정확하고, 차체는 속도가 올라갈수록 더 안정적으로 가라앉는다. 장거리 주행에서 피로가 적은 이유다.
서스펜션은 ‘절묘하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주파수 감응형 댐퍼(SFD)가 노면 상황에 따라 감쇠력을 조절하면서, 잔진동은 부드럽게 걸러내고 코너에서는 단단하게 버텨준다. 요철을 넘을 때는 한 번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한 번 정리하는 느낌이다. 덕분에 SUV 특유의 출렁임보다는 세단에 가까운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
정숙성 역시 이 차의 중요한 포인트다.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 시스템과 차음 설계 덕분에 도심에서는 거의 소음을 느끼기 어렵고, 고속에서도 풍절음이 크게 올라오지 않는다. 엔진이 개입하는 순간에도 소리는 거칠지 않고 부드럽게 정제된다.
결국 이번 연비 테스트를 통해 확인한 건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다. 필랑트는 ‘큰 차는 연비가 나쁘다’는 고정관념을 기술로 설득하는 모델이다. 도심에서는 전기처럼 움직이고, 장거리에서는 효율적인 하이브리드로 변하며, 주행 감각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디자인, 공간, 주행 성능, 그리고 효율. 이 모든 요소를 균형 있게 묶어낸 결과가 바로 이번 테스트에서 나온 14.9km/L와 25.0km/L라는 숫자다.
가격은 트림에 따라 4,331만원(테크노)에서 4,971만원 수준이며, 한정판 ‘에스프리 알핀 1955’ 모델은 약 5,218만원에 판매된다. 시승차량은 아이코닉 트림(4,697만원)에 시그니처 패키지(HUD+새틴포레스트블랙 외장색상+스마트룸미러. 114만원), BOSE 사운드 시스템(133만원) 등 추가사양이 적용된 5,042만원으로 판매되는 풀옵션 모델이다.
르노 필랑트는 단순히 잘 만든 크로스오버가 아니다. ‘효율까지 완성한 크로스오버’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임재범기자 happyyjb@naver.com




















